
동학농민 운동이란
구한말 우리 역사의 커다란 전환점이 되었던 동학농민운동에 대해 알기 쉽게 정리해 드립니다. 이 글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부터 농민들이 왜 일어섰는지, 그리고 그 결과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아보겠습니다.
1894년, 왜 농민들은 낫을 들었나?
19세기 말 조선은 안팎으로 큰 혼란에 빠져 있었습니다. 밖으로는 서구 열강과 일본이 통상을 요구하며 압박해 왔고, 안으로는 '세도 정치'의 폐단으로 인해 국가 기강이 무너진 상태였습니다.
잠깐만,세도정치란??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기 전, 조선의 '세도정치'는 한마디로 "소수의 가문이 국가 권력을 독점하여 나라의 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진 상태"였습니다.
농민들이 왜 목숨을 걸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나??
1. "돈 주고 벼슬을 산다" — 매관매직의 일상화
안동 김씨, 풍양 조씨 같은 특정 가문이 권력을 쥐면서 정치는 뇌물로 움직였습니다.
• 매관매직: 돈을 주고 수령(군수, 현감) 자리를 사는 일이 당연시되었습니다.
• 본전 뽑기: 거액을 들여 지방관이 된 관리들은 자신이 쓴 돈을 회수하고 더 큰 부를 쌓기 위해 부임하자마자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했습니다. "백성을 위한 정치"는 사라지고 "내 주머니를 채우는 약탈"만 남은 셈이죠.
2. 농민을 절망에 빠뜨린 '삼정의 문란'당시 농민들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세 가지 세금 제도, 즉 **'삼정(三政)'**의 타락이었습니다.
• 전정(田政): 땅에 매기는 세금입니다. 없는 땅에도 세금을 물리고, 규정보다 몇 배나 많은 세금을 강제로 걷었습니다.
• 군정(軍政): 군대에 가는 대신 내는 옷감(군포) 세금입니다.
• 황구첨정: 갓 태어난 아기에게도 군포를 부과했습니다.
• 백골징포: 이미 돌아가신 조상님 이름으로도 세금을 걷어갔습니다.
• 환곡(還穀): 원래는 봄에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에 이자 조금 붙여 받는 구휼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관리들은 억지로 곡식을 빌려주거나, 모래를 섞어 양을 늘린 뒤 엄청난 이자를 뜯어내는 '고리대금업'으로 변질시켰습니다.
3. 자연재해와 전염병, 그리고 '동학'의 확산
정치가 부패한 상황에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뭄과 홍수 같은 자연재해가 이어졌고, 콜레라 같은 전염병이 돌아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 국가의 무능: 백성들이 죽어가는데도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습니다.
• 동학의 등장: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라는 평등사상을 내건 동학은 차별받고 고통받던 농민들에게 들불처럼 번졌습니다. "세상을 바꾸어야 한다"는 의지가 종교를 통해 하나로 뭉치게 된 것입니다.
결론: 폭발 직전의 압력솥 같았던 사회
세도정치 하의 조선은 뚜껑이 꽉 닫힌 채 계속 가열되는 압력솥과 같았습니다. 농민들은 집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도적이 되거나(화전민), 소극적인 저항을 이어갔지만 관리들의 수탈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결국, 1894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이라는 마지막 불씨가 던져지자 전봉준과 농민들이 거대한 폭발처럼 일어난 것이 바로 동학농민운동입니다.
특히 지방 관리들의 부패는 극에 달했습니다. 농민들은 과도한 세금과 탐관오리의 수탈에 시달리며 생존권 자체를 위협받고 있었죠. 이때 평등 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학(東學)'**은 고통받는 민중들에게 큰 희망이 되었고, 이는 단순한 종교 운동을 넘어 사회 개혁 운동으로 번지게 됩니다.
고부 민란에서 전주화약까지
1. 운동의 시작: 고부 군수 조병갑의 폭정
직접적인 도화선은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가혹한 수탈이었습니다. 이에 분노한 농민들은 전봉준을 중심으로 1894년 1월 보국안민(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함)과 제폭구민(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함)을 기치로 내걸고 일어났습니다.
2. 황토현 전투와 전주성 점령
농민군은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하며 파죽지세로 전주성까지 점령했습니다. 당황한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를 빌미로 일본군까지 한반도에 발을 들이게 됩니다. 외세의 개입을 경계한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했습니다. 이때 농민들은 스스로 개혁을 실천하기 위해 민정 기관인 **'집강소'**를 설치하고 신분제 폐지 등을 요구했습니다.
3. 2차 봉기와 공주 우금치 전투
하지만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 간섭을 강화하자, 농민군은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다시 봉기했습니다(2차 봉기). 그러나 근대식 병기로 무장한 일본군과 관군의 연합군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고,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배를 끝으로 지도자들이 체포되며 운동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실패했지만 사라지지않은 동학농민운동의 정신
동학농민운동은 비록 군사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우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 근대 사회의 초석: 이들이 주장한 신분제 폐지와 토지 개혁 요구는 이후 갑오개혁에 반영되어 우리나라 근대화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 항일 의병 투쟁의 모태: 살아남은 농민군 세력은 이후 일제강점기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되어 독립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습니다.
• 민주주의의 뿌리: 백성이 주인이라는 민중의 자각은 훗날 3.1 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나아가 오늘날의 민주주의 정신으로 이어졌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불의에 맞서고 평등한 세상을 꿈꿨던 평범한 사람들의 위대한 첫걸음이었습니다.


동학농민운동의 상징이자 '녹두장군'으로 불리는 전봉준(1855~1895)은 우리 역사에서 민중의 권익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혁명가입니다. 그의 주요 업적과 활동을 4가지 핵심 포인트로 정리해 드립니다.
전봉준의 주요업적과 활동
1. 농민 수탈에 저항한 '고부 봉기' 주도
전봉준의 가장 큰 업적은 부패한 권력에 맞서 민중의 목숨을 건 저항을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 도화선: 고부 군수 조병갑의 혹독한 수탈(만석보 수세 강제 징수 등)에 맞서 농민들을 결집했습니다.
• 사발통문 작성: 주동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게 이름을 원형으로 쓴 **'사발통문'**을 돌려 거사를 도모했습니다. 이는 평등하고 민주적인 의사결정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2. '폐정개혁안 12개조' 제시와 신분제 타파
그는 단순히 싸우는 데 그치지 않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구체적인 사회 개혁안을 정부에 요구했습니다.
• 신분 평등: 노비 문서 소각, 천민(백정)에 대한 차별 철폐 등을 주장하여 수백 년간 이어진 계급 사회를 흔들었습니다.
• 경제 정의: 무명잡세(불법 세금) 폐지와 토지의 평균 분작(평등한 분배)을 요구하며 민중의 생존권을 챙겼습니다.
• 여성 인권: 청상과부의 재가를 허용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권 개선안을 포함했습니다.
3. '집강소' 설치를 통한 민치(民治) 실현
전주화약 이후,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 라는 농민 자치 기구를 설치했습니다.
• 이는 관청의 행정에 농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스스로를 다스린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민주적 자치 행정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탐관오리를 징벌하고 개혁안을 현장에서 직접 실천했습니다.
4. 외세 침략에 맞선 항일 구국 운동
처음에는 내부의 부패를 척결하는 것이 목표였으나,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며 국권을 위협하자 '항일 구국'으로 운동의 성격을 확장했습니다.
• 2차 봉기 당시 일본군을 몰아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우금치 전투를 이끌었습니다. 비록 근대식 무기의 열세로 패배했지만, 그의 정신은 이후 항일 의병 투쟁과 독립운동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왜 우리는 그를 기억해야 할까?
전봉준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다"라는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정신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그가 꿈꿨던 '모두가 평등한 세상'과 '자주적인 나라'는 훗날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소중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매일매일'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청일전쟁 결정적 도화선 텐진조약,동학농민운동 발발 시모노세키조약 (0) | 2026.01.13 |
|---|---|
| 한국전쟁 6.25전쟁 전개과정, 피혜와 결과 참전국가와 참전하게 된 이유 (1) | 2026.01.01 |
| 청소년 주식계좌개설 방법 알아보기 국민은행 (4) | 2025.06.12 |
| 일본여행, 처음 일본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가이드 훗카이도 (3) | 2024.08.07 |
| 일본의 역사, 문화, 요리 그리고 가봐야 할 장소 (0) | 2024.07.31 |